우리가 흔히 즐겨마시는 화이트와인이나 레드와인 등 와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와인은 포도의 즙을 발효시켜서 만든 알코올성의 양조주를 일컫는다. 또한 넓은 의미에선 포도의 즙으로 만든 알코올성 음료뿐만 아니라 뭇 과실이나 꽃 혹은 약초를 발효시켜서 만든 알코올성 음료를 총칭하는 말로도 확장되어 쓰인다.
와인 or 포도주?
영어의 'Wine'은 한국어로는 포도주로 번역하나 엄밀히 말해서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Wine은 1차적으로는 포도주를 일컫지만, 과실주 전반을 뜻하는 말로 확장되어 쓰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해당 작물이나 곡류의 이름을 함께 병기하여 블루베리 와인, 라즈베리 와인, 아이스베리 와인, 체리 와인, 감 와인 등으로 쓴다. 다만 Wine이 본래는 포도주의 의미이고 블루베리 와인이니 체리 와인이니 하는 건 유자차, 인삼차 같은 것이라서 "Wine=포도주"라는 번역이 오역인 건 아니다.
통상 언론이나 고전 번역처럼 영어식 외래어 표기를 꺼리는 경우엔 '포도주'라 표기하고, 대중적으론 '와인'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로는 비노(vino)로 철자는 같지만, 발음은 약간 다르다.
전 세계에서 매년 생산되는 와인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최근엔 옐로우 와인(Yellow Wine)이나 앰버 와인(Amber Wine) 등 기존 분류에 새로운 와인 종류가 추가되기도 한다.
와인 성분을 들여다보면, 레드 와인은 평균적으로 수분 86%, 에탄올(알코올) 12%, 글리세롤 1%, 유기산 0.4%, 타닌 및 폴리페놀계 화합물 0.1%, 기타 성분 0.5%로 구성된다.
참고로 일괄적으로 포도주로 번역했는데 정작 원문에서는 포도주가 아닌 다른 과일 발효주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중매체에서 포도주가 자주 등장하고, 쉽게쉽게 마시는 장면이 많아 막연하게 맥주급으로 도수가 낮은 술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기 쉬운데 사실 생각보다 도수가 강한 편이다. 희석식 소주가 20도 후반을 찍곤 했던 과거에는 약한 술이었지만, 도수가 센 포도주는 과일소주보다 높고 지금의 희석식 소주와는 조금 낮거나 비슷한 정도이다. 그래서 포도주를 처음 마시는 사람들 중에는 생각보다 강한 도수에 놀라는 경우도 있다.
와인의 역사 - 고대
술 중에서도 과일주(과실주)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양조주의 일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부터 와인을 식사에 곁들이거나 요리에 사용했으며, 이는 현재 서양 음식 문화의 기본이 되었다. 현재도 서양 술이라고 하면 와인과 맥주가 가장 먼저 나올 정도. 다만 포도라는 과실 자체가 당과 효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자연 발효를 통해 와인이 되기에 어디서 누가 처음 만들어 먹었는지 추정하는 것은 많은 난제가 따른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나 코끼리가 물이 괸 웅덩이나 나무 구멍 등에 나무 열매가 떨어져 자연 발효되어 생긴 자연 과실주를 음용하는 사례가 목격된 바 있다. 동물도 이럴진대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 나타난 것이 약 200만 년 전이라 추정하는데 포도는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전인 약 700만 년 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포도주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앞선다고도 할 수 있겠다.
기원전 7,000년 무렵 조지아 ~ 아르메니아 ~ 터키 동북부 지역, 이른바 코카서스 지방에서 출토된 포도씨앗과 타르타르산(tartaric acid)를 보고 최초로 포도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기원전 6,000년경의 포도 씨, 항아리, 와인 만드는 기구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후 신석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토기가 등장했고 기원전 약 4,000년에 와인 용기의 뚜껑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조지아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약 3,5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와인 용기 안에 와인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발견 기록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와인 항아리 유물이 발견된 조지아를 '포도주'의 기원으로 볼 수 있지만, 시대 차이가 있을 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코카서스 지역을 시작으로 소아시아를 통해 발칸(고대 그리스)으로, 그리고 이탈리아(고대 로마)로 전래되었다가 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이베리아 및 프랑스 지역까지 퍼져나갔다는 것은 대개 부정하지 않는다. 대략 올리브와 거의 전파 경로를 같이한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포도주는 유물로 증거가 남아있는 한에선 가장 오래된 술로 꼽힌다. 다만 실물이 없어서 그렇지 여러 고대 기록과 양조장 유물 등 증거를 보면 학계에서는 맥주를 가장 오래된 술로 보고 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와인과 관련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와인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이집트 유물을 보면 현대의 와인처럼 와인병에 양조한 연도, 장소, 포도의 품종을 기록한 라벨을 붙여 관리했을 정도였다. 또한 성서에 따르면 노아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후 최초로 빚은 술이 와인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가 최초로 행한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다.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잔치에 쓸 포도주가 다 떨어져서 큰일이다"라고 예수에게 말하자 잠시 고민하다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고. 예수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면서 축성한 술 또한 포도주였고, 이에 포도주가 미사에 사용되면서 서구에서는 신성한 이미지 또한 갖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전부터 포도주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난성에 위치한 자후 유적지에서 초기 신석기 시대인 약 9천 년 전 최초로 포도를 사용해서 술을 빚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술은 포도와 산사나무 열매, 그리고 꿀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에서는 전 세계 야생 포도 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50종 이상의 포도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원사 시대를 거치면서 곰팡이로 곡물을 당화시킬 수 있는 단계를 맞이한 중국에는 수수나 쌀로 만든 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과일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나라의 도시 타이시에 과실주가 양조되었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주나라 시대의 주례(周禮)에는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술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과일로 만든 술(酪)이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유라시아의 포도가 중국으로 전래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무제의 특사로 중앙아시아로 갔던 장건 장군은 유라시안 포도(Vitis vinifera ssp. vinifera)가 재배되는 것을 보고 장안(長安)으로 와인 제조용 포도를 가져왔다. 이후로도 쌀과 포도를 사용하여 포도주를 빚은 기록들이 여럿 남아있다. 예를 들면 조조의 아들이자 위나라의 황제이던 조비의 경우 포도는 물론 포도로 담근 술을 극찬했다.
이러한 종류의 포도주가 아시아권의 역사적인 포도주라고 할 수 있으나, 근현대에 와인(wine)이란 단어가 '포도주'라는 포도로 빚은 술을 총칭하는 말로 번역되어 동아시아의 포도주를 따로 칭할 말이 없는 것은 다소 안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서양의 와인(wine)이란 단어는 포도만이 아니라, 과일이나 꿀 등의 재료에 들어있는 당을 바로 발효시켜서 만든 술의 총칭이다. 이것은 곡식의 낱알에 들어있는 탄수화물을 일단 당화시킨 이후에 발효시키는 방식과 비교된다. 대표적으로 맥주가 맥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곡물을 당화시키며, 중국/한국/일본의 쌀로 만든 술들이 누룩을 이용해서 곡물 당화를 한다. 이 과정이 와인(wine)과 비어(beer)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와인의 역사 - 그리스 로마 시대
헬레니즘 시대의 포도주와 직접 관련된 신으로는 디오니소스가 있으며, 신화와 함께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예술, 문화 등의 발달과 함께 즐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야생종 포도는 접지하여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그리스 당시에는 91가지의 포도 품종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 포도주는 심히 걸쭉한 시럽이나 진배없는 것이라 반드시 물을 타 팔도록 로크리스가 법으로 정할 정도였다. 물 안 타고 마시는 사람이나 타 민족을 야만인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포도주와 물을 섞는 데 쓰는 그릇을 크라테르(κρατήρ)라고 하는데(라틴어로는 cratera), 이는 크레이터라는 어휘의 어원이기도 하다.
로마군 군인과 민간 육체 노동자들은 포도주 운송 과정에서 포도주가 쉬어 발생하는 식초를 처리하고, 현지의 물을 마시고 탈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포도주 식초를 식수에 타서 포스카(Posca)라는 음료로 만들어 마셨다. 이는 식초의 아세트산으로 악취를 제거하고 식수에 있을 박테리아를 살균하는 효과가 있었다. 로마군의 형벌 중에는 식초를 주지 않고 맹물만 마시도록 하는 벌도 있었을 만큼 포도주 식초는 생필품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렇게 살균 목적으로 물에 식초를 타거나 맥주로 만들어 마시는 모습은 로마가 멸망하고 중세에 와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로마시대에서 로마인들은 포도주를 납그릇에 넣고 끓여서 마시기도 했다. 포도주의 아세트산과 납성분이 만나면 아세트산납(Pb(CH3COO)이 생성된다. 이 경우 해당 성분으로 인해 포도주에서 단맛이 돌게 된다. 로마인들은 아세트산납이 함유된 포도주 시럽을 사파(sapa)라고 불렀다. 이런 조리법은 납 중독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있었지만 과연 얼마나 고대 로마인들이 이를 자주 섭취했고 어느 정도의 납 중독이 발발했는지는 학계에서 이견이 있는 편이다.
성경에 나오는 해면에 적신 쓸개 탄 신 포도주(혹은 몰약이나 그냥 신 포도주)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먹이는 것도 한 병사가 상술할 포스카를 마시도록 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냥 식초를 먹였다는 해석과 달리, 이 경우에는 자신들도 평소 마시던 음료를 그대로 준 것이므로 죽어가던 예수를 동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와 더불어 이후의 시대에 걸쳐 유럽에 포도주가 널리 퍼진 데에는 종교와 예식과 관련된 문화적 요소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에 대한 의식은 로마 신화의 바쿠스 의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그리스도교의 성체성사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빵을 가리켜 자신의 몸(성체)이라 일컫고, 포도주(물론 적포도주)를 가리켜 자신의 피(성혈)라고 일컬어 성체성사(또는 성만찬)에서도 사용되는 등 빵과 함께 신성한 의미가 부여되면서 유럽에서 포도주는 위상이 높다. 로마 제국의 팽창과 함께 전파된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다른 술은 안 마셔도 포도주만은 예외로 마시는 신자도 있다.
와인의 역사 - 중세 시대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포도 재배와 와인 산업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으나, 미사에 필요한 포도주를 조달하기 위하여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명맥을 유지하였고, 곧 빠르게 부흥하였다. 오히려 수도원과 성당의 끊임없는 개량 덕분에 퀄리티 면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능가하는 발전을 이룬 시기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풍부한 노동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가능하였으며,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여 관련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수도원에서는 대량으로 와인을 생산하여 의식에 필요한 분량을 제외한 나머지를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포도주 판매에 이윤이 남게 되자 과학적인 방법들을 연구 및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진 와인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와인은 중세 유럽에서는 남유럽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북서유럽에서는 귀족 집안조차도 평소에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와인은 보통 귀한 손님이 방문할 경우에 내는 고급 만찬의 일부였으며, '귀한 손님을 따라온 기사들'의 경우는 대부분 그 식사에서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계급과 중요도에 따라서 특별한 자에게만 차별적으로 내놓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보르도 등 남유럽에서는 와인을 물처럼 마실수 있었다. 평민들도 값싼 저급 와인들은 일반적인 음료수로 마셨다. (M. Adamson, Food in Medieval Times, Greenwood Press, 2004) 특히 프랑스는 12세기 이래로 보르도 지역과 부르고뉴에 포도 플렌테이션이 형성되어서 영국, 네덜란드 등 지역에 대규모로 수출했다. 프랑스 와인의 명성이 높은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으며, 반면 스페인과 이탈리아 와인은 생산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받는 것은 국제 수출보다는 자국에서 서민들과 부자들을 가리지 않고 마신 역사적 배경이 관련되어 있다.
유럽의 와인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까지도 전해지긴 했고, 꽤 고급품 대접을 받았긴 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수입산이어서 매우 비쌌고, 기존의 곡주의 영향력이 강해서 제조법의 갈피를 못 잡았기 때문이다. 후한대에는 포도주를 뇌물로 바쳐서 주자사가 된 인물이 있어서 후대의 소동파까지 시로 조롱했는데, 이건 포도주가 뇌물이 될 정도로 희귀성을 만족시켰다는 이야기. 이백을 포함한 시인들의 시들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당 대 이후의 포도주 제조 시도에는 포도와 쌀을 섞어서 만들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즉 포도로만 만든 포도주는 모조리 서역 수입산. 이백의 시에도 포도주에 맞는 술잔은 유리잔이라고 하고 있는데, 유리 역시 대표적인 수입 사치품이었다.
결국 고급품의 이미지가 확고해져서 이후 포도만으로 발효시켜 마신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도 곡주처럼 그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했다.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던 중앙아시아권과 접한 중국이 이 지경이니 한반도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는 상황. 일본의 경우 전국 시대부터 남만인(포르투갈인)이나 홍모인(네덜란드인) 등 서양에서 온 상인이나 선교사들에게서 정말로 어쩌다 입수하여 귀한 것을 조금씩 마시는 정도였으나 사실상 과시용 사치품이나 다름없었고, 역시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다.
와인의 역사 - 근대
16세기 이후부터는 와인 자체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고, 상류층은 고품질 와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신대륙 발견으로 와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17세기 남아프리카, 18세기 호주와 미국 서부까지 전파되었다. 19세기에는 필록세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어 와인 산업이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농업 기술 발전, 경제 발전, 교통수단 발전, 국제화 등으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한반도 또한 고려 말 근제집, 16세기 수운잡방, 17세기 동의보감에 쌀과 포도로 빚은 포도주 양조법이 실려있다. 이렇게 쌀을 추가하는 이유는 동아시아권에서 주로 먹는 포도종인 캠벨이 양조를 하기에는 당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와인의 경우 부족한 당도를 보충하기 위해 발효 전에 정확히 계량된 만큼의 설탕을 추가한다. 술의 발효란 기본적으로 당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이다.
현재 '근대' 항목의 설명이 매우 부족하나, 이 시기는 파스퇴르의 술에 관련된 연구와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마시는 종류의 와인이 탄생한 시기이다. 중세에 마시던 와인과 19~20세기 이후 마시게 된 와인은 다른 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다. 발효에 대한 비밀, 오크통이나 숙성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제조법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역사적 사건들 때문에 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귀족 사회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 당시까지 러시아 황실 및 귀족 집단은 이 포도주의 중요한 수요처였다. 이 수요처가 사라지면서 포도주 수요가 급감하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고, 결정적으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포도주 시장은 오랫동안 침체에 빠진다.
와인의 역사 - 현재
일본에선 과거 버블 경기 시절을 통해 와인이 부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그래서 와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름난 와인을 농장째로 싹쓸이하는 졸부들도 많았다고 한다. 갑부가 아닌 일반인들도 룸살롱 등지에서 로마네 콩티에 돈 페리뇽 로제를 섞은 폭탄주를 마시며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버블이 빠진 뒤에 죠 아라키의 소믈리에, 소믈리에르 같은 만화를 통해 와인에 대한 지식이 높아지고 와인 소비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욱 늦었다. 머루로 담그는 머루주는 리큐르에 가까운 물건이고,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에 포도, 쌀, 누룩으로 포도주를 담그는 양조법이 기록되어 있긴 하나 이를 유럽 등지의 와인과 같은 술로 보기는 힘들고, 유럽의 와인이 들어온 것은 개항기 이후이다. 여담으로 헨드릭 하멜이 제주도에 포류한 다음에 제주 목사에게 포도주와 은잔을 뇌물로 바쳐서 환심을 사보려 한적이 있었는데 포도주를 맛본 조선 관리들은 그 맛에 몹시 감탄하여 포도주를 모조리 해치우고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네덜란드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줬다고 한다. 아마 당시 제주 목사와 관리들이 기록상으론 유럽의 와인을 맛본 첫 번째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극소수의 사치품이나 다름없었고,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 마찬가지였으며 대중들에게 와인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볼 수 있다. 2004년~2008년 정도에 걸쳐 한국 와인 시장은 매년 수십 %씩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래서 떠오르는 신흥 시장으로 외국의 주요 와이너리 오너들이 저마다 한 번씩 한국을 찾아와 프로모션 행사를 갖는 일도 많았다. 웰빙 열풍 때 웰빙 식품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른바 폭탄주라 불리는 음주 문화의 개선과 양주나 소주보다 알코올 함량이 낮은 저도수 주류 섭취 권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꽤 잘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2008~2010년에 걸쳐 거품이 크게 꺼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는 환율의 상승. 1,300~1,400원 하던 유로화는 1,700~1,800원을 넘게 뛰어올랐고, 이는 고스란히 유럽산 와인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2번째로는 국제 경기 경색.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장기 신용 대출) 붕괴 사태와 PIGS의 재정 악화 등으로 국제 경기에 적색 신호등이 켜지면서 사치품에 해당하는 와인 수요가 급감하게 되었다. 셋째로는 수입사의 난립과 출혈 경쟁에 따른 유통 질서 교란이다. 와인 시장이 성장하며 너도나도 수입사를 세워 중소 수입사가 난립하게 되고, 여기에 LG, 신세계 등 대기업까지 가세했다. 이 과정에서 출혈 경쟁과 연이어지는 세일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되었다. 네 번째 이유는 이 시기에 사케가 인기를 끌며 붐이 일어난 것. 이 시기 와인 동호인 상당수가 사케로 넘어가며 '고급주'라는 인식 속에 붐을 일어났으나 이 사케 붐도 2~3년 정도 반짝하다가 2011년 엔화 가치가 폭등하면서 사케 수입 가격이 급등하자 거품처럼 푹 꺼졌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
관세, 주세, 교육세, 부가세를 포함하여 총세율 68%에 이르는 높은 세금, 또한 관련 법령에 의해 규제에 묶여있어 면허제로 되어있는 주류 판매망과 수입사-도매-소매로 이어지는 다단계의 유통 경로에서 들러붙는 업자들 마진이 우리나라가 와인값이 (외국에 비해) 비싼 원인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한동한 폭발적 성장세를 구가하던 와인 시장이 급랭하게 된 것은 관세/유통의 문제보다는 환율과 국제 경기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붐이 휩쓸고 지나간 후 거품이 빠지면서 경쟁력이 약한 중소 수입사들이 적잖이 정리되었고, 와인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와인의 유통망 역시 그간 쌓은 경험을 통해 진일보하였으며, 결정적으로 FTA가 체결되자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신대륙 와인이 수입되어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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